오늘, 피아노를 쳤다.


다시 만난 피아노. 반가워.



7살때, 나는 피아노를 배웠다. 넉넉치 않은 집안형편에 여느 집 아이들처럼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내 유별난 행동 덕이었다.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디서 피아노치는 걸 봤는가보다. 그리고 마음에 들었나보다. 어느 날부터 저 키에 맞는 선반만 보이면 손가락으로 피아노 치는 시늉을 해댔단다. 작은 손을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입으로는 딴딴딴, 나름 음정을 넣어서 소리를 내면서.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계속 그러더란다. 시도때도 없이.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조르거나 투정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러고 있더란다.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 정애야, 피아노 치고 싶냐." 그러면
" 네에~~" 웃으면서.

엄마는 가르쳐 주고 싶었을 거다. 동네 피아노 학원은 항상 다니는 길목에 있는데, 애가 저렇게 좋아라 하는데 한번 데려나 가보자. 그때야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엄마가 얼마나 큰 결심을 한 것이었는지.
어느 날 엄마가 손을 잡고 집에서 3분도 안걸리는 학원에 데려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간판모양새, 주변 풍경, 학원 선생님 등은 분명히 기억이 난다.  은행나무가 많던 길목에 작게 자리잡고 있던 그 학원.
그렇게 나는 피아노를 배웠다. 바이엘부터 시작해서 가곡집, 체르니 30번, 체르니 40번. 초등학교때 이사를 간 동네에서 체르니 50번까지 배우고 바하까지 쳤다. 꽤나 많이 배운 셈이다.
9살때에는 대회에도 나갔고 상도 받았다. 사실 거짐 다 받는 상이지만 부모님께서는 꽤나 좋아하셨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대회가 있던 날, 엄마가 깨끗하게 빨아준 옷을 입었었고, 온 가족이 응원을 왔었다. 대기실에 앉아 떨려혀는 나를 보고 심호흡을 가르쳐 주며 웃으셨던 아버지도 기억난다.

피아노 치는 것이 참 좋았다. 학원에서 들리는 피아노 소리도 좋았고, 신기한 음표가 날아다니는 악보도 좋았고, 학원 선생님도 좋았고, 학원 공간 자체도 좋았다. 
11살때 쯤에는 집안 살림이 많이 나아져 내 피아노가 생겼다. 어찌나 좋았는지. 엄마는 사람들이 집으로 놀러올때마다 피아노를 치게 했다. 어쩌다 한번씩 친척들, 엄마 친구들이 올때마다 나는 외삼촌이 사주신 하얀 원피스를 입고 피아노를 쳤다. 한 두곡 쯤 잔잔한 걸 치다가 마지막으로 헝가리 무곡같은 강렬하고 신나는 곡을 치면 다들 좋아했다.
엄마는 아직도 그때를 기억한다. 그때 내가 정말 예뻤다고. 사람들이 너를 참 예쁘다고 했다고. 피아노도 참 잘쳤다고.

이사를 간 후 만난 피아노 선생님은 최악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유는 모르겠다. 나한테 왜 그렇게 쌀쌀맞았는지. 뭐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선생님이 싫었고 피아노 치러 가는 것도 싫었다. 결국 어느 날 나는 손톱이 잔뜩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톱으로 탁탁탁 소리를 내며 건반을 두드렸다. 손톱과 건반이 부딪히는 소리는 꽤나 거슬린다. 그 날 선생님은 내게 화를 많이 냈다. 그리고 나도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그때부터 피아노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피아노도 가족들이 몇번이고 원할 때만 쳤다.
그러다 피아노는 조율도 안된채 버려졌고 결국 이사를 하면서 헐값에 팔렸다.


그리고 오늘. 그 이후로 처음. 나는 피아노를 쳤다.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피아노를 치고 싶었었는지. 얼마나 피아노 소리를 그리워했는지. 건반을 누를때의 느낌과 그 똑떨어지는 소리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후배와의 점심약속이 깨지고 도서관에 가 책을 찾는데, 갑자기 피아노 생각이 났다. 오늘 꼭 피아노를 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이 뒤로 제껴지고 오늘 할 일 우선순위 1위에 피아노 치기가 올랐다.

결국 두시간 후,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가는 동안 그 설레던 마음. 따뜻하게만 느껴지는 바깥 풍경. 참으로 오랫만에 느껴보는 생의 기운.

25살의 난 별로 칠 수 있는 곡이 없었다. 악보를 보는 법도 가물가물해서 손으로 그려가며 쳐야 했다. 하지만 좋았다. 그래도 좋았다. 피아노 의자에 앉을때, 피아노 뚜껑을 열때, 악보를 올려 놓을때, 건반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을때, 숨 한번 크게 쉬고 드디어 첫 건반을 눌렀을때, 똑 떨어지는 그 소리가 났을때, 곧이어 도레미파솔라시도. 내 손에서 음정이 흘러나왔을 때. 모든 순간순간이 다 좋았다.

한 시간이 훌쩍 갔다. 고요하고 무드있는 문 리버라는 곡에 트로트 반주에나 쓸 반주를 맞추면서도 좋다고 실실대며, 몇번이고 그 곡을 쳤다.

피아노연습실 선생님은 처음부터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매일매일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생계를 꾸려가는 선생님이, 14년만에 피아노를 치는 내 기분을 알리가 있겠나.

돌아오는 길에, 작은 꿈이 하나 생겼다.
" 내 친구들 결혼식 피아노 연주는 내가 해줘야지. " 훗. 이미 한명은 맡아놨다.
다들, 그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형식으로 결혼식을 할 줄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피아노를 쳐줘야지.

피아노가 좋다. 피아노 소리가 좋다. 건반이 눌려지는 느낌이 좋다.
다시, 피아노를 쳐야 겠다.


by 홍씨 | 2008/11/04 23:19 | 생(生)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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